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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책 이야기 [저물 듯 저물지 않는]

Power Reviewer 2018. 1. 8. 22:32

 

 

 

저물 듯 저물지 않는

_에쿠니 가오리 (지은이) | 김난주 (옮긴이) | 소담출판사 | 2017-12-12

 

 

조야, 하면 떠오르는 것은 걱정스러우리만큼 가녀린 몸과 하얀 피부다.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으면 한 뼘이 고스란히 남던 것을 기억한다.” 이 소설의 도입부분이다. 나이 쉰여덟의 라스는 연락이 두절된 그의 젊은 연인 조야(라운지 바 싱어)를 찾아 나선 길이다.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눈 내리는 늦은 저녁이다. 라스는 택시를 탔다. 조야가 일하던 그 라운지 바를 가는 길이다. 택시비를 지불하기 위해 코트 주머니에서 지폐를하고 문장이 끊어진다. 이건 또 무슨 상황? 몇 쪽 넘기지 않았는데 벌써 탈자(脫字)? 그리곤 무대가 일본으로 바뀐다.

 

 

이 소설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도쿄타워등등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다작(多作)작가이기도 한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소설이다. 여러해 전 출간한 작가의 소설 한낮인데 어두운 방(소담출판사, 2013)과 대비되는 책 제목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일본 문학 최고의 감성 작가로서 요시모토 바나나, 야마다 에이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여류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그간 감성 일변도의 작품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책 속의 책, 소설 속의 소설을 만나보게 된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탈자처럼 소설이 끊긴 이유는 이 소설의 일본 무대 주인공인 책벌레 미노루(중년기에 접어든 나이다. 요즘 새로 설정된 연령분류로 보면 아직 청년에 가까운 나이일지도 모르는 50)가 소설 속 소설을 읽던 중 누군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소설 속 소설 역시 작가의 작품이다. 북유럽이 배경인 미스터리다. 연락이 끊긴 애인을 찾아 나선 중년 남자 라스가 등장하고, KGB도 나오고, 목이 그어진 시체도 발견된다. 나름 읽는 재미가 있다(미노루가 책을 읽던 중 종종 끊기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마치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정체

불명의 알싸한 과일조각을 씹는 기분이다.

 

 

책을 읽고 있을 때면 미노루는 거기에 있으면서 없는 사람 같았다(더구나 늘 그는 책을 읽었다)” 미노루와 결혼해 살며 딸까지 낳았지만 이혼 한 미노루의 전처 나기사가 하는 말이다. 그 후 나기사는 딸을 키우면서 연하의 남자와 재혼했다. 몇 가지 요인 중 미노루가 책에 빠져살아 가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가? 배우자가 책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참기 힘들었나? 생각해볼 문제다. 한편 재혼한 남편 후지타는 텔레비전에 빠져 산다. 나기사는 어렸을 적 엄격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텔레비전 시청이 자유롭지 못했다. 성장 후엔 일과 연애와 육아로 너무 바빠서 텔레비전을 볼 여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대한 그녀의 밑바닥 생각은 텔레비전을 장시간 보는 인간은 한가하고 고독하든지 지성이 없든지(아니면 양쪽 다), 그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고 내심 경멸했다. 그래서 재혼한 남편이 쉬는 날이면 종일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생각을 안 하자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어떤 유의 친절함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적어도 책만 보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 든다. 텔레비전은 남편이 지금 뭘 보는지 알 수 있고, 같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원참. 나도 가끔 아내와 텔레비전을 같이 시청하지만,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할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소설은 주인공 미노루와 그 주변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냥 그려지고 있다. 어쩌면 두서 없이 진행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이 이리저리 부딪히고, 마음의 갈등이 수면위로 올라왔다 사라지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꿈을 꾸고, 희망을 품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스케치처럼 그려진다. 이 소설의 제목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아마도 작가가 소설 속 소설의 무대인 북유럽의 여러 특징 중 하나인 백야 [white night, 白夜]에서 모티브를 잡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소설 속엔 백야라는 단어가 안 나오지만). 저물 듯 저물지 않는, 나이가 들어가는 듯 들어가지 않는(반대로 나이가 들어도 들어가지 않는 듯), 책을 읽는 듯 읽지 않는, 사랑하는 듯 사랑하지 않는...써놓고 보니 말장난 같지만, 우리 삶이 그렇지 않든가. 그런 듯 그렇지 않는, 그렇지 않은 듯 그런...

 

 

#저물듯저물지않는 #에쿠니가오리 #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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